‘부여 흑거미’ 박지영 역으로 또 한 번 걸크러시…“이미지 고착화 걱정 안해, 마음 가는 대로 봐주시길”
“이게 배우로서의 리스크일 수도 있는데요, 저는 주변을 의식하지 않고 많이 털털한 편이에요(웃음). 내숭 이런 것도 잘 못 떨고 이런 제 성향을 숨기는 것도 진짜 못하는 성격이거든요. 사실 신인 때는 이래서 많이 혼나기도 했는데 이런 점이 지영이를 연기할 때 오히려 더 편했던 것 같아요. 조신한 척하는 지영이로 있을 땐 카메라 앞에서 역할을 받아 연기하는 배우로서의 제 모습이었다면, 원래 지영이의 모습을 연기할 땐 털털하고 편한 제 자신 그대로의 모습을 보여줄 수 있었거든요(웃음).”
1989년 충청남도 부여, 안 맞고 사는 게 일생일대의 목표인 온양 찌질이 장병태(임시완 분)가 부여농고로 전학 오는 과정에서 충남 일대를 사로잡은 ‘짱’인 아산 백호 정경태(이시우 분)로 오해 받으며 벌어지는 청춘 코미디를 그린 ‘소년시대’에서 이선빈은 병태의 소꿉친구이자 여깡패 ‘부여 흑거미’ 박지영 역을 맡았다. 부모님 앞에서는 조신한 여고생이지만 그 뒤에서는 천부적인 싸움 실력으로 동네 여자 일진들을 휘어잡고 다니는 지영은 “약자는 건드리지 않는다”는 철저한 정의를 지키는 ‘멋진 언니’의 모습을 보여준다. 이 정의가 극 중에서 가장 최약체 병태에게도 당연히 해당됨은 물론이다.
“지영이는 싸움을 잘하는 캐릭터이기 때문에 ‘부여 흑거미’란 롤 타이틀이 주어져 있죠. 그러면서도 중간에 병태와 부딪치거나 할 때는 좀 더 소녀스러운 모습을 보이기도 해요. 병태는 지영이의 본 모습을 다 알고 있으니까요. 그러다 보니 부여 흑거미로서 우악스러운 모습과 병태를 보며 설레는 지영이의 소녀스러운 모습을 왔다갔다하는 게 어색하지 않았죠(웃음). 또 어떻게 보면 지영이를 짝사랑하는 호석이(이상진 분)의 덕도 봤던 것 같아요. 지영이가 병태에게 가진 짝사랑의 감정이 소녀스럽게 티 나야 하는 순간에도 반대로 자기를 졸졸 쫓아다니는 호석이 때문에 ‘아이씨!’하면서 다시 원래 모습으로 돌아가게 되니까요(웃음). 그런 장치들 덕에 지영이와 부여 흑거미로 왔다갔다하는 변화가 시청자들이 보기에도 더 쉽게 이해되고 개연성 있게 느껴졌던 것 같아요.”
극 중 지영은 부여농고를 힘으로 장악한 경태에게 복수하려 하는 병태의 싸움 스승이었고, 극 밖에서 이선빈은 충청도 사투리가 영 서툰 임시완의 사투리 선생님이었다고 했다. 충청남도 천안 출신으로 사투리 ‘네이티브 스피커’인 이선빈과 함께 어느 샌가 1980년대 충청도 사투리에 빠져들게 된 임시완은 더 맛깔나는 사투리 애드리브를 직접 만들기도 했다고.
“아빠랑 통화만 하면 바로 사투리를 해주시니까 ‘리스닝’을 안 하고 싶어도 할 수밖에 없죠(웃음). 사실 어떻게 보면 저는 이 작품을 할 때 특혜를 받고 시작한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해요. 사투리가 궁금하면 부모님께 여쭤보면 되니까(웃음). 지영이와 병태가 티키타카하는 신에서 애드리브가 정말 많았는데요, 선화(강혜원 분)를 보고 지영이가 ‘불여시’라고 욕하니까 병태가 ‘그럼 니는 불늑대여’하는 것도 애드리브였어요. 병태와 붙는 신의 70%를 대본이라 본다면 30%를 애드리브로 채울 수 있었던 건 다 감독님이 저흴 믿어주셨기 때문이죠.”
싸움 스승으로서의 카리스마 넘치는 지영의 모습도 시청자들의 많은 사랑을 받았지만, 이 같은 티키타카를 바탕으로 한 병태와의 새콤달콤한 청춘 로맨스도 ‘소년시대’의 인기에서 빼놓을 수 없는 요인 중 하나였다. 주먹을 부르는 운명 아래 태어난 찌질이 병태이기에 다정한 말보다 걸쭉한 욕과 주먹이 먼저 나갈 수밖에 없지만, 그래도 그런 병태를 있는 그대로 아껴주는 유일한 사람인 지영의 순정은 그를 연기한 이선빈마저도 가슴 뭉클하게 만들었다고 했다.
“사실 어릴 때 부모님끼리의 친분 탓에 소꿉친구가 된 친구들을 보면 어릴 땐 티격태격 재미있게 놀다가도 나중에 시간이 지나고 다시 만나면 너무 달라진 모습에 쑥스러운지, 창피한지, 설레는지 모르는 느낌이 들잖아요. 게다가 ‘소년시대’에선 그 보수적인 시대에 한 지붕 두 가족으로 내가 좋아했던 남자애가 ‘남성’이 돼서 우리집에 나타났고요. 심지어 잘생기기까지(웃음)! 그런 설렘과 동시에 병태를 지켜주고 싶다는 모성애까지 느끼면서 지영이는 정말 병태를 보며 여러 가지 감정을 느꼈을 것 같아요.”
그런 병태가 다시 교실 피라미드의 가장 아랫자리로 곤두박질치면서 경태의 패거리에게 끝도 없이 얻어맞고, 그 고통을 벗어나기 위해 결국엔 절친마저 잔혹하게 폭행하게 되는 중반부를 보고 충격을 호소하는 시청자들도 많았다. 직전까지 청춘 코미디와 로맨스의 달달한 분위기가 이어지던 와중에 이뤄진 이 충격적인 전환은 실시간 방송을 챙겨보던 배우들도 놀라게 만들었다고. 폭력의 수위가 너무 세지 않냐는 우려도 있었지만 이선빈은 “감독님이 전달하려는 메시지에 도달하기 위한 시련의 수단 중 하나가 바로 병태가 폭력을 당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사실 저는 대본으로만 봤을 땐 ‘아 결국 걸렸네, 이럴 줄 알았다’ 하고만 생각했는데 실제로 그 장면을 보니 시완 오빠가 연기를 너무 잘해서 마음이 정말 불편하고 아프더라고요. 다들 병태가 까불거리면서 으스대는 걸 ‘으이구’하면서 안쓰럽지만 귀엽게 보게 되는 그 과정을 잘 몰입해서 따라가다가 병태가 무너지는 걸 보고 같이 무너진 거죠. 그 직전까지 쌓인 감정이 병태와 함께 무너지는 느낌을 받으니 ‘이건 너무 심하다, 힘들다’는 반응이 나왔던 것 같아요. 저도 6화를 보고 울다가 시우한테 전화해서 ‘야 너 진짜 너무한 거 아냐?’하고 화를 버럭 냈어요(웃음). 그런데 오히려 좋아하더라고요. 자기 연기가 잘됐다는 거니까(웃음).”
시청자들과 ‘소년시대’를 보며 함께 울고 웃었던 이선빈은 앞서 ‘술꾼도시여자들’과 영화 ‘미션 파서블’에 이어 이번 ‘소년시대’에 이르기까지 걸크러시 매력을 뽐내며 그에 맞는 이미지를 쌓아왔다. 다만 이 이미지가 차기작인 웨이브 오리지널 시리즈 ‘미션 투 파서블’에서도 겹친다는 점에서 연기의 풀이 좁아질 수 있다는 우려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을 것 같다. 딱 맞는 역할도 중요하지만 좀 더 다양한 이선빈의 모습을 보고 싶어 하는 대중들도 많아지는 지금, 배우의 생각은 어디쯤 머물러 있을까.
“‘38 사기동대’ 때 제가 ‘차도녀’에 도회적인 이미지로 연기했다 보니 이후의 제 작품을 못 보신 분들은 제가 차가운 사람일 거라고 생각하시더라고요(웃음). 그 이미지를 바꾸려고 청순한 것도, 우악스러운 것도 다 한 번씩 해 봤는데 거기서 알게 된 건 어차피 제가 의도하고 ‘바뀐 캐릭터를 사람들에게 보여줘야지’ 하면 오히려 그 모습이 전해지지 않는다는 거예요. 그래서 그다음부터는 이미지에 연연하지 않고 그냥 제가 하고 싶은 걸 했죠. ‘술꾼도시여자들’이나 이번 ‘소년시대’처럼 걸크러시 이미지가 계속 돼서 사람들이 지겹게 본다 하더라도 그건 제가 건드릴 수 있는 영역이 아닌 것 같아요. 대중은 마음이 가는 대로 받아들이실 테니까 저는 ‘사람들이 이선빈을 어떻게 볼지’를 걱정하고 작품을 고르지 말자고 다짐하면서 연기하고 있어요(웃음).”
김태원 기자 deja@ily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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