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감찬에 가려졌던 ‘양규 장군’ 역 맡아 열연…데뷔 18년 만에 인기상·우수상 동시 수상 영예
“사실 ‘연인’과 ‘고려거란전쟁’이 비슷한 시기에 촬영하게 됐는데 ‘고려거란전쟁’에서는 장군으로서의 면모를 많이 보여드리려고 노력을 많이 했죠. 처음 시작할 때는 이런 위인이 계셨다는 걸 저조차도 몰랐던 터라 많이 부끄러웠거든요. 그때 만나는 사람들한테 밥 먹듯이 이런 말을 했어요. ‘이 작품을 잘해서 내가 양규 장군님을 사람들에게 알릴 거야’라고. 그 말대로 돼서 너무 뿌듯합니다(웃음).”
제2차 여요전쟁(고려거란전쟁) 때 최전선에서 맹활약하며 고려의 멸망을 막아낸 용장 양규는 지승현에게 있어 여러 가지 의미로 뜻 깊은 인물이다. 이 작품 방영 초반부터 시청률 상승세에 가장 큰 디딤돌 역할을 했던 흥화진 전투에서 40만 거란 대군을 3000명 남짓의 고려군으로 막아낸 것을 시작으로 지난 1월 7일 방영한 16화에서 그가 전사한 마지막 전투에 이르기까지 양규가 등장하는 모든 회차는 방영이 끝난 뒤에도 온라인 커뮤니티와 SNS를 들썩이게 만들 만큼 대중들의 큰 관심을 받았다. 이른바 ‘양규 앓이’를 호소하는 시청자들도 나올 정도였지만 누구보다 그를 앓고 있었던 것은 단연 지승현이었다. 인터뷰 내내 캐릭터를 언급할 때마다 ‘장군님’이란 칭호를 꼭 붙이는 것만 봐도 그랬다.
“사실 대본으로만 봤을 때는 정말 그분을 잘 모르고 ‘그냥 장수인가 보다’라고만 생각했어요. 그러다 사료를 검색하고, 김한솔 감독(연출)님께 이야기를 들어보니 정말 화려하다고 할 정도로 대단한 업적을 쌓으신 분이란 걸 알았죠. 40만 명이 쳐들어오는 흥화진 전투를 3000명만으로 7일을 지켜냈다는 게 전쟁학자들 사이에서도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였대요. 이렇게 훌륭하신 분이 왜 이제까지 알려지지 않았을까, 왜 나는 이분을 지금까지 몰랐을까 그게 참 부끄럽더라고요. 그분의 업적을 고증대로 잘 표현해낸다면 제게 주어진 일을 잘해내는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고요.”
양규가 전사한 마지막 전투를 그린 16화는 시청자들을 통곡의 소용돌이로 밀어 넣었다. 배우들마저 현장에서 한 번, 방영분을 실시간으로 보면서 또 한 번 울었다니 그의 최후가 얼마나 장엄했는지를 새삼 깨닫게 하는 부분이다. 그 신을 촬영할 때가 마침 생일이었다는 지승현은 촬영이 끝난 뒤 감독으로부터 “양규 장군님이 돌아가신 날 배우 지승현이 다시 태어났다”는 덕담을 들었다고 회상했다.
“그 신에서 양규 장군님은 총 100합의 액션을 하는데요, 특히나 감정이 중요한 신이다 보니 이 합이 정리되지 않으면 감정에 집중할 수 없었어요. 그래서 원래 드라마는 현장에서 합을 짜야 하는데 이 신만큼은 미리 맞춰놓고 싶어서 제가 감독님들께 부탁드렸었죠. 특히 장군님이 머리를 맞고 투구가 벗겨진 뒤에 ‘100보’를 외치는 상황은 원 테이크로 진행됐어요. 활을 이로 물어서 쏘는 장면부터 마지막 서서 죽음을 맞이하는 장면까지 신 전체가 원 테이크였죠. 촬영 감독님도 카메라를 든 채로 저와 함께 연기하실 정도로 분위기를 잘 잡아주셔서 저도 그 감정을 잘 유지하며 촬영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웃음).”
여느 작업 환경보다 더 고될 수밖에 없는 사극 촬영 현장이었지만 ‘고려거란전쟁’은 날씨의 덕을 톡톡히 봤다고 했다. 연출팀이 일부러 꾸미지 않아도 날이 개야 할 때는 개고, 비나 눈이 필요할 때는 귀신같이 내렸다는 것. 그렇게 날씨마저 촬영팀을 도와줄 때마다 현장에서는 이런 말이 터져나왔다. “양규 장군님이 현장에 오셨다!”
“그 말 진짜 많이 했어요(웃음). 저희가 날씨 덕을 그만큼 많이 봤거든요. 장마철에 흥화진 전투를 찍을 때도 날씨가 저희를 엄청나게 도와줬고, 곽주성 탈환 후 적을 쫓을 때는 저희가 뿌리지도 않은 안개가 그림처럼 내려와서 멋진 그림이 완성됐어요. 또 마지막 전투와 양규 장군님의 시신이 들어오는 신은 며칠 간격을 두고 찍었는데, 시신이 수레에 실려 들어오는 장면을 촬영할 때도 정말 눈이 펑펑 내리는 거예요. 그걸 보고 감독님도 ‘와, 미쳤다’ 그러시더라고요.”
사극 촬영 현장이라면 아무래도 중년 이상의 연차가 높은 배우들이 많이 출연하다 보니 경직된 분위기 속에 상하관계가 뚜렷할 것이라고 여겨지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고려거란전쟁’의 현장은 MZ세대들도 열광하는 작품답게 유연했다는 게 지승현의 이야기였다. 특히 어린 스태프들이 지승현의 영화 ‘바람’(2009)을 뒤늦게 보고 그가 연기한 김정완의 대사를 흉내 내거나 ‘한 번만 해 달라’며 조르기도 했다고.
“아무래도 젊은 세대들도 ‘바람’을 많이 보니까요(웃음). 흥화진 전투 찍을 때 저희 촬영 팀에 어린 스태프들이 있었는데 ‘바람’을 보고 나서 저랑 나이 차이가 이렇게 많이 날 줄 몰랐다 그러는 거예요. 제가 거기선 교복을 입고 나오니까요(웃음). 그 친구들도 그 영화를 정말 좋아해서 자기들끼리 제 뒤에서 ‘바람’의 대사를 따라 하기도 하고, 제게 시키기도 했죠. 그러면 ‘어이, 내 흥화진의 양규다’ ‘끄지라, 거란 놈아’ 이러면서 저도 같이 놀았고요(웃음).”
이번 ‘고려거란전쟁’으로 조카뻘의 팬들이 많이 늘어난 것에 아직도 어안이 벙벙한 지승현은 매회 방영이 끝날 때마다 소속사 직원들이 전해주는 후기를 보며 함께 즐거워했다는 뒷이야기를 들려줬다. 자신이 직접 찾아보기에는 ‘컴맹’이라 어려워서 못한다면서도 “요샌 또 컴맹이란 말도 안 쓴다면서요? 기계치라고 말했어야 했는데”라며 쑥스러워하는 그에게 가장 기억에 남는 시청평을 물었다.
“‘연인에서는 미워해서 미안했다, 여기선 사랑한다’는 말이 재미있었어요(웃음). 또 양대춘이라고 양규 장군님의 아들이 있는데 ‘3차 고려거란전쟁에 양규 아들을 출연시켜라. 그런데 지승현이 젊은 모습으로 분장해서 다시 등장해라’ 이런 댓글도 있더라고요. 아니면 ‘양규’가 아니라 ‘얌규’로 얼굴에 점찍고 모른 척 다시 나오라고(웃음). 아무래도 다들 장군님이 떠난 것을 아쉬워 해주셔서 그런 반응들이 나온 것 같아요. 여러 가지로 너무 재미있더라고요(웃음).”
2023년 그가 출연한 두 사극 작품, MBC ‘연인’과 KBS2 ‘고려거란전쟁’이 모두 연말 연기 시상식을 휩쓸었고, 특히 ‘고려거란전쟁’으로 지승현은 데뷔 18년 만에 처음으로 인기상과 우수상을 동시에 수상하는 영예를 안았다. 장르와 캐릭터를 가리지 않고 열연하며 꾸준히 존재감을 쌓아왔던 만큼 그의 수상 소식은 본인과 가족은 물론이고 배우 지승현을 사랑해 온 오랜 팬들에게도 눈물 나게 기쁜 소식이 아닐 수 없었다. 마흔의 고비를 넘어 배우로서 또 한 번 성장하게 된 지승현의 2024년은 이전까지의 노력을 딛고 더욱 찬란하게 빛날 것이란 기대도 모인다.
“제가 출연했던 영화 ‘바람’이 실제 흥행은 실패했지만, 온라인 사이트에서 많은 사람들이 다운로드 받아 보면서 뒤늦게 인기를 끌었다고 ‘다운로드 천만 영화’라고 하잖아요(웃음). 그런데 ‘다운로드 천만 영화’가 아니라 ‘진짜 천만 영화’였으면 아마 저는 그 어린 나이에 허파에 바람이 든 채로 살았을 거예요. 그렇지 않았기 때문에 그 우여곡절의 끝에서 지금처럼 성장해 나가는 계기가 되지 않았나 싶죠. 앞으로도 장르나 역할을 가리거나 특정한 것 하나만 하고 싶지 않아요. 비슷한 연기를 계속 하게 되면 노력을 덜 하게 되고, 관성으로 연기하게 되기도 하거든요. 당장은 사극을 두 편이나 보여드렸으니 현대극에도 욕심이 생기네요(웃음). 그래도 장르를 가리지 않고 오랫동안 제 모습을 보여드리는 게 꿈입니다.”
김태원 기자 deja@ily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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