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전 대통령의 운구차가 경남 김해 봉하마을을 떠나 영결식이 열리는 서울로 향하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청와대가 오락가락한 것을 두고 위기관리 능력의 부재라는 지적이 일었다. 2009년 5월 23일,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 직후 이명박은 봉하마을 빈소를 직접 찾겠다고 밝힌다. 하지만 이명박이 보낸 조화가 빈소에서 훼손되고, 청와대는 다시 조화를 보낸다. 그러는 사이 현직 대통령의 신변 안전 문제가 거론됐고, 이명박은 빈소 방문 계획을 거둔다. 대신 그달 29일 영결식에 참석하는 것으로 대신하게 된다.
하지만 영결식장에서 이명박은 무슨 연유에서인지는 알 수 없으나 ‘미소’를 짓는 모습이 카메라에 포착된다. 누리꾼들의 질타가 쏟아진다. 오세훈 당시 서울시장은 ‘비정치적이고 평화적이어야 한다’는 전제 아래 서울광장을 추모제 장소로 허용하겠다고 발표했지만, 정부 측이 반대하면서 국민적 분노가 서서히 일기 시작한다.
한승수 당시 국무총리는 덕수궁을 통제한 이유로 소요사태가 우려된다는 뜻을 폈다. 추모제 참석자를 ‘폭도’로 본 것이다. 또 당시 주상용 서울경찰청장은 “차벽(전경버스)이 병풍 같아서 더 아늑하게 느껴진다는 분들도 있다”고 말하면서 국민적 분노를 부채질하게 된다. ‘이명박 탄핵소추안’ 발의를 위한 국민 서명이 본격화되기 시작한다.
광우병 촛불집회 당시 집권 6개월 차를 맞이했던 이명박은 ‘탄핵’이라는 단어를 듣고 큰 충격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그런 마당에 집권 2년차에 재등장한 ‘탄핵소추’는 야당이 이 ‘서거 정국’을 정치적으로 활용할 것이란 걱정을 낳게 했다. 국민이 느끼는 슬픔을 정부가 잘 달래고 있느냐는 물음에도 국민이 관심을 기울이게 된다(결과적으론 이명박에게 참 다행히도 당시 야당은 이런 국민적 분노와 증오를 수렴할 능력이 미비했다).
정치권에서는 이명박이 ‘조문 정국’을 뚫고 나오려면 경제든 정치든 ‘개혁 바람’을 일으켜야 한다고 봤다. 가시적인 정국 전환 카드는 뭐니뭐니해도 ‘사람을 바꾸는 일’, 즉 개각이었다. 당시 정부에서 강경파로 분류되던 김경한 법무부 장관, 이상희 국방부 장관, 유명환 외교통상부 장관, 유인촌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에 대한 ‘7월 개각설’이 제기됐고, ‘정치 수사’라는 비판을 받았던 검찰에 대해 임채진 검찰총장 교체설도 제기됐다. ‘여야 영수회담을 열어야 한다’ ‘한나라당 내 친박계를 포용해야 한다’는 등 각양각색의 처방이 내려졌다. 하지만 이명박은 ‘정치’에는 약한 사람이었다. 무엇 하나 뚜렷하게 해내지 못했다.
그해 6월 4일, 한나라당 국회의원 연찬회장도 찬물을 끼얹은 듯한 분위기였다. 한나라당이 5년 동안 지켰던 정당 지지율이 민주당에 역전당했다는 한나라당 자체 여론조사가 나온 것이다. 한나라당 쇄신특위가 한국리서치에 의뢰해 전국 성인 남녀 1000명을 대상으로 한 정당 지지율 조사 결과, 민주당이 23%, 한나라당이 21.1%로 나타났다. 한나라당 자체 조사에서 1위를 지키지 못한 것은 2005년 이후 처음 있는 일이었다. 무엇보다 노무현 서거 전만 해도 민주당의 지지율은 10%대 초반 수준이었다. 그러니 또 한나라당 내에서는 조기 전당대회를 열어야 한다느니, 이러다가는 10월 재보선은 필패라느니, 그러면 2010년 6·2지방선거까지 낭패라느니 하는 말들이 새어나왔다. 자중지란이었다.
무엇보다 이명박으로선 친형인 이상득을 잃은(?) 것도 큰 ‘마이너스’가 된다. 당 쇄신 차원에서 줄기차게 제기되어온 지도부 사퇴론이 이상득을 끌어내리는 것으로 흘러갔기 때문이다. 이상득 의원은 앞서 6월 3일 한나라당 최고위원·중진 연석회의에서 “앞으로는 당과 정무, 정치 현안에 관여하지 않고 지금보다 더욱 엄격하게 처신하겠다. 경제, 자원, 외교, 안보에만 전념하겠다”며 ‘2선 후퇴’를 천명한다. 친형이 있어서 여의도는 걱정하지 않았던 이명박은 여의도의 ‘반통령’ 이상득을 떠나보내야 했다. 그 직후 또 이명박 정부 개국공신 중 하나인 이재오는 6월 10일 민주항쟁을 기념하며 태백산 새벽 산행과 막장체험을 한 뒤 그의 팬카페 ‘재오사랑’에 “이제 서울광장에는 거짓과 허위의 깃발을 내리고 민주주의 성숙의 깃발을 올리자”고 썼다가 역풍을 자초하기도 한다. 이명박으로선 도와주는 사람이 없었던 셈이다.
김대중 전 대통령 장례는 국장으로 엄수됐다. 사진공동취재단
민주당 측은 ‘조문 정국’을 어떻게든 야권에 유리하게 끌고 가려고 했다. 노무현 재평가 작업에 착수했고, 추모 분위기가 이어지도록 했다. 6월 임시국회 정국에서 정부와 여당을 강하게 밀어붙여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왔다. 노무현 빈소에 흩어졌던 친노세력이 다 모이면서 결집하는 모양새였다. 이해찬, 한명숙 전 국무총리, 유인태 전 정무수석, 유시민, 김두관 전 장관들, 노무현의 왼팔 안희정 등 원로와 소장파들이 한자리에 모이면서 ‘흩어지면 죽는다’는 공감대가 형성된다. 사실 모래알 같은 민주당보다 차돌 같은 친노세력이 더 무섭다는 이야기가 많았다. 야당은 이명박의 사과와 관계자 문책 등을 요구했다. 6월 임시국회를 거부하고 거리로 나섰다. 정치권에서는 이상득의 후퇴에 이어 박영준 국무총리실 국무차장, 장다사로 청와대 민정1비서관, 김주성 국가정보원 기획조정실장 등 ‘이상득 사람’의 퇴진도 요구했다.
바깥도 이명박을 도와주지 않았다. 북한이 핵실험에 이어 유엔의 대북제재 결의에 반발해 우라늄 농축작업 착수를 선언했다. 이명박의 강경한 대북관이 도마에 오른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6월 11일 6·15남북공동선언 9돌 기념 특별 연설에서 이명박 정부에 대해 “민주주의를 역행시키고 있다. 행동하지 않는 양심은 악의 편이다”라고 비판한다. 일각에서는 대정부 투쟁을 선동하는 발언이라고 해석했고, 정가가 발칵 뒤집힌다. 전직 대통령이 국론을 분열한다는 비판이 제기됐고, 반대편에서는 전직 국가 원로로서 할 말은 했다고 주장하면서 보수와 진보 진영이 충돌한다.
그러던 차, 8월 18일 김대중 전 대통령이 지병으로 서거한다. 그러면서 노무현도 김대중도 없는 야권의 앞길은 ‘반 MB연대’를 통한 ‘대통합론’으로 방향타가 결정된다.
특히 민주당 박지원 의원이 “김대중 전 대통령은 민주당이 정세균 대표를 중심으로 단결하며, 야4당과 단합하고, 모든 민주·시민사회와 연합해 반드시 민주주의, 서민경제, 남북문제 위기를 위해 승리하라고 하셨다. 이를 유언 중 하나라고 정세균 대표에게 보고했다”고 밝힌다. 야권의 대통합 논의가 수면 위로 떠오르는 순간이었다. 퇴임 후에도 민주당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해왔던 두 지도자가 사라진 상황에서 어떤 절박함이 민주당의 변신을 꾀하게 됐던 것이다.
이명박은 8·15 경축사에서 ‘행정구역 및 선거구제 개편’을 이야기했다. 이를 한나라당이 동력을 걸면서 ‘미디어법 날치기 처리’에서 벗어나려 했다가 DJ 서거로 동력을 잃게 된다. 중대선거구제와 권역별 비례대표제 도입 등은 국면 전환 카드로는 괜찮은 비책이었다. 국정운영 기조를 ‘중도 실용’ 노선으로 맞추고, 친서민 정책을 강도 높게 추진하려던 이명박 정부는 돌출한 변수 앞에서 행로를 잃는다.
한나라당도 그동안 반 DJ정서를 정치적으로 활용해 세를 결집하는 수법을 써왔지만, 그마저도 할 수 없게 된다. DJ는 영남권 보수우익진영의 단결을 꾀하는 수단이었다. 그만큼 한나라당은 정치적 반사이익으로 무임승차했던 경우가 많았다. 10·28 재보선은 코앞에 다가와 있었다. 이명박 정부의 전반부 평가로 해석될 가능성이 컸고, 청와대도 정부도 여당도 재보선 승리를 위해 어떤 방법이든 써보려 했다. 하지만 야권의 두 지도자의 부재는 오히려 살아 있을 때보다 더 힘이 세 보였다.
최기서 언론인
잠깐 - 국장과 국민장 노무현 전 대통령은 국민장으로, 김대중 전 대통령은 국장으로 엄수됐다. 국장과 국민장은 절차에서 큰 차이는 없지만 국장은 9일, 국민장은 7일이다. 국장·국민장에 관한 법률을 보면 대통령직에 있었던 사람이나 국가, 사회에 현저한 공훈을 남겨 국민의 추앙을 받는 사람의 장례를 국장 또는 국민장으로 엄수할 수 있다. 현직 대통령은 국장을 엄수하는 것이 관례이며 정부 수립 이후 국장을 엄수한 사례는 재임 중 서거한 박정희 전 대통령이 유일했다. 국장 당일은 사실상 공휴일로 지정되고 장례 비용을 전액 국고에서 부담한다. 국민장은 공휴일로 지정되지 않고, 장례비용은 일부 보조가 원칙이나 전액 지원도 가능하다. 최규하 전 대통령, 백범 김구 선생, 육영수 여사, 장면 전 부통령 등이 국민장으로 치러졌다. 당시 노 전 대통령의 영결식을 국장으로 치러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왔지만 국민장으로 거행됐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