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를 침공한 견훤은 경애왕을 죽이고 노략하고 마침내 왕비를 겁탈했다. 무능한 신라를 철저히 능멸한 견훤은 그 자리에 자기에게 고분고분할, 이름뿐인 왕을 세운다. 그가 바로 경순왕이다. 그런데 이상하다. 경순왕이 고분고분하게 군 것은 견훤이 아니라 왕건이었으니.
견훤과 궁예는 망해가는 신라를 누르고 압박했다. 견훤이 칼의 정치를 한 반면 왕건은 포용의 정치를 했다. 바람 앞의 등불인 신라였으나 천년을 버틴 신라인의 심지가, 신라 문화의 힘이 그리 녹녹치 않다는 것을 알고 섬세하게 접근한다. 신라가 그를 섭섭하게 해도 모르는 척 넘어가주며 신라에 공을 들인 것이다.
918년, 마침내 왕건은 고려의 왕으로 즉위한다. 견훤은 바로 축하 사신을 보냈으나 신라는 모른 체했다. 2년 후에야 겨우 사신을 보냈음에도 불구하고 왕건은 시비를 걸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진심으로 신라에게 손을 내밀었다. 927년 팔공산 전투 때 신라를 돕기 위해 전투에 나선 왕건은 거기서 폭망, 간신히 목숨만 부지하고 도망가게 된다. 오래는 버티지 못할 신라를 위해 목숨을 건 것이다.
경순왕은 928년, 왕건을 경주 동궁 월지(月池)로 초대해 감사의 주연을 베푼다. 왕건은 종자 50명과 함께 경주에서 수십 일을 머물렀단다. <삼국유사>가 말한다. 견훤이 왔을 때는 이리떼, 범떼가 경주 시내를 헤집고 다니는 것 같더니 왕건이 왔을 때는 마치 부모를 대하는 것과 같았다고. 그랬기 때문일까. 935년 10월, 마의태자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경순왕은 신라를 왕건에게 바친다. 그러자 왕건은 장녀 낙랑 공주를 망한 신라의, 왕 아닌 왕, 경순왕과 혼인시켰다. 왕건답다.
“내가 하늘의 뜻을 얻지 못해 점점 더 화란이 일어나게 된다”며 탄식하던 경순왕, 피바람 몰아치던 그 시기에 칼끝을 걷듯 살아온 그 인생은 그래도 무고한 백성의 피를 아꼈던 것 같다. 분명 경순왕은 무능했다. 그러나 스스로의 무능을 알았던 점에서 그는 무능하면서도 무능한지도 모르는 리더보다는 훨씬 낫다. 그렇다고 경순왕이 옳았다고는 할 수 없겠다. 목숨 걸고 싸우다 힘이 미치지 못하면 그때서야 빼앗길 일이지 천년의 사직을 어찌 그리도 선선히 넘겨주느냐는 마의태자의 결기가 훨씬 힘이 있고 매력적이다.
그러나 견훤의 리더십이냐, 왕건의 리더십이냐를 선택해야 한다면 당연히 포용의 리더 왕건이 아닐까? 더 이상 참고 견디기 어려웠을 때 경순왕의 선택은 노예로 길들이려는 견훤이 아니라 망자의 품위를 인정해준 왕건이었다는 사실, 나는 그 사실에 주목한다.
이주향 수원대 교수
※본 칼럼은 일요신문 편집방향과 다를 수도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