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 닮은 딸은 아버지가 계속 자신을 몰아갈 경우 가문을 무너뜨리는 진실을 폭로할 거라며 아버지를 협박한다. 아버지의 약점을 본능적으로 아는 것이다. 부녀가 모두 명령 혹은 협박 이외의 대화를 해본 적이 없는 권력의 화신들이다.
이 상황이 어찌 라니스터의 상황이기만 하겠는가. 조직이 중요하다고 조직을 키우기 위해 조직원을 억압하는 리더는 너무나 많다.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불철주야로 뛰지만 가족들이 무슨 생각을 하고 어떻게 살아가는지에 대해서는 까막눈인 가장은 왜 또 그리 많은지. 생존만이 중요한 사람들, 그 울타리에서 사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보지 못하는 사람들이. 기다려주지 못하고 밀어붙이고 비교하고 닦달하는 것에만 능한 사람들이 많다.
그들이 왜 그렇게 됐을까. 그들 자신도 어쩌면 희생양이다. 거품욕망으로 돌아가는 정신 나간 세계, 정신없는 세계를 살아내기 위해 기를 쓰고 살다가 정신을 놓게 된 것이다. 매일매일 비교당하고 살면서 성과를 내야 한다는 강박, 이만큼 살지 못할까 하는 초조 속에서 살다 보면 내 눈으로 내가 보는 게 아니라, 세상이 보는 걸 내가 보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회의가 든다. 내 눈은 어디 갔을까 하는 의문.
2018년에는 잘 기다려줬으면 좋겠다. 나에 대해, 나와 인연이 있는 사람들에 대해. 진짜 자아가 튼튼한 사람은 잘 기다릴 줄 아는 사람이다. 성급한 사람은 잘 기다리지 못한다. 젊은 날은, 열정이 나를 잡아먹고 내가 나를 잡아먹고 고통스럽게 성장하는 시기이기 때문에 잘 기다리는 일이 어렵다. 그런데 젊음을 통과하면서 기다림을 배우지 못하면 중요한 것을 놓치는 것이다.
바로 이 기다림이 사랑과 집착의 차이 아닐까. 사랑과 집착, 처음에는 비슷한데 경험해보면 아주 다르다. 사랑은 오래 참고 온유하다. 반면 집착은 조급하고 숨이 막힌다. 기다림은 사랑의 속성이고, 조급함은 집착의 성격이다. 그런데 또 집착을 거치지 않은 사랑이 어디 있을까. 조급함을 기다림으로 바꿔내는 것, 그것이 2018년의 삶이기를.
이주향 수원대 교수
※본 칼럼은 일요신문 편집방향과 다를 수도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