묘지에 묻힌 둘은 셈하는 게 아니라며 어른은, 그러면 너의 형제자매는 ‘다섯’이라고 정정해주자 아이는 이렇게 말한다. “그들의 묘지는 초록! 보이잖아요. 거기서 나는 가끔 손수건 감침질을 하기도 해요. 거기 땅바닥에 앉아 있기도 하죠. 나는 앉아서 그들에게 노래를 불러줘요. 해가 진 뒤엔 종종 내 작은 수프 그릇을 들고 가, 거기서 저녁을 먹기도 해요.”
함께 놀고 함께 살고 있으면 죽은 것이 아니다. 그들이 누워있는 자리를 찾아가 바느질도 하고 노래를 불러주기도 하는데 어찌 가족이 아닐까. 죽은 이는 존재가 아니라며 셈에서 빼는 어른과, 죽음도 삶에 끌어들일 줄 아는 아이, 당신은 누구의 셈법에 동의하는가. 죽음도 삶으로 끌어들이는 아이의 셈법이 자연스럽지 않은지. 혹 죽음과 삶을 분리하기만 하는 어른의 셈법이 경직된 것은 아닌지. 그래서 워즈워드는 아이는 어른의 아버지라 했나보다.
발밑만 보는 어른과 하늘을 보는 아이, 하늘을 본다는 것은, 별을 본다는 것은 다른 차원을 살게 하는 힘이다. 발밑만 보지 말고 별을 보라 했던 호킹이 먼 길을 떠났다. 그 말이 무슨, 호킹 그 자신처럼 별을 연구하고 가설을 세우라는 말이겠는가. 오히려 그의 별은 그가 평생을 따라다닌 루게릭병에 대해 한 말 속에 들어있는 것 같다. “나는 앞으로 할 일이 너무 많다는 것을 깨달았다. 놀랍게도 나는 삶을 더 즐기게 되었다.”
진짜 꿈은 발밑이 아니라 별에서 온다. 진정으로 홀린 빛, 홀린 아름다움이 나도 모르는 사이에 꿈이 되고 길이 되고 운명이 되는 것이다. 발밑만 보면 아이 사랑의 힘이 아이를 통제하는 힘이 된다. ‘공부는 왜 안하느냐, 그걸 해서 어떻게 먹고 살려고! 어쩌자고 그렇게 하느냐, 이런 방식이 좋다!’ 이런 사랑은 시선의 거리, 존중의 거리가 없기 때문에 서로서로 숨이 막힌다. 사랑할수록 숨이 막힌다.
별을 보는 자는 아이를 사랑하는 힘으로 아이의 꿈을 사랑할 줄 알고, 아이의 정서를 존중할 줄 안다. 그 힘으로 다른 아이들을 보고, 생명이 있는 것들을 본다. 지금 누군가를 통제하고 싶다면 잠시 눈을 들어 하늘을 보고, 별을 보자. 그리고 긴 숨을 쉬며 통제가 된 사랑을 날려 보내자. 그 자리에 당신의 별이 있다.
이주향 수원대 교수
※본 칼럼은 일요신문 편집방향과 다를 수도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