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법의 추악한 이면을 보았다는 듯 허탈한 표정이었다. 변호사인 나는 40년 가까이 법의 밥을 먹고 살아왔다. 특정인을 법으로 파괴시켜 달라는 청부가 흔했다. 검사 출신이 많은 대형로펌이 재미를 보는 사건이었다. 그런 청부 사건은 정치권이나 기업뿐 아니라 사회 곳곳에 퍼져있다. 한 대형교회의 분쟁에서 목사의 사회적 생명을 법으로 죽여주는데 거액의 보수가 약속된 걸 보기도 했다. 그가 말을 계속했다.
“검사에게 아무리 결백을 주장해도 절벽 같았어요. 사기꾼이라는 범죄프레임에 나를 강제로 우겨넣는 것 같았어요. 유리한 증거를 제출하면 묵살해 버렸어요. 뒤에서 저를 죽이기 위한 어떤 거래가 있는 것 같았습니다. 제 회사에서 일해오던 기술이사가 갑자기 검찰과 법원에 나타나 제 등에 칼을 꽂았어요. 제가 사기꾼이라는 거죠. 뒤늦게 알았는데 저를 고소한 기업 회장님을 여러 번 만났어요. 그 쪽에 증인으로 포섭당한 것 같아요”
재판에서 증인들은 캐스팅된 배우 같았다. 거액의 출연료나 좋은 자리가 뒤에서 대가로 거래되기도 했다.
“법원에서는 어땠어요?”
내가 물었다. 최종적으로 바로 잡아야 하는 건 법원이다.
“정말 이상했어요. 저는 그래도 삼십년 이상을 첨단과학 기술을 연구한 학자로서 또 공과대학 교수로 살았습니다. 제가 사기꾼인가 아닌가 보려면 제 특허기술이 이용된 시판되는 전자제품을 확인하면 됩니다. 학회나 제가 기계를 납품한 재벌기업에 물어보면 바로 답이 나옵니다. 그런데 판사들은 수사기록만 보고 저는 기술이 하나도 없는 사기꾼이라는 거예요. 판사들은 진실이 안보이고 검사가 쓴 삼류 소설 같은 기록만 보이나 봐요.”
그의 가족은 1심 법원의 판결문을 공과대학교수들에게 돌리며 호소했다. 과학자인 교수들이 분노했다. 어떻게 비전문가의 말만 듣고 한 과학자의 삶을 그렇게 뭉개버릴 수 있느냐는 것이다. 진정서를 써가지고 법정에 교수들이 찾아갔다. 항소심 법정에 증인을 서겠다는 과학자들이 줄을 섰다. 마침내 그는 무죄로 석방이 됐다. 지위가 있는 사람도 이렇게 법의 그물에 걸릴 때가 많았다. 사회적 약자는 더 말할 것도 없다. 짜장면 배달 소년을 살인범으로 만든 ‘약촌 오거리사건’이 그 예다. 살인현장을 지나갔다는 이유로 한 소년이 십년간 징역을 살았다. 도중에 진범이 잡혔는데도 수사기관은 의도적으로 묵살했다. 법원은 시신의 상처와 증거로 제출된 칼끝의 형태만 비교해 보았어도 무죄를 선고할 수 있었다. 당연히 확인해야 할 걸 하지 않았다. 판사들은 있는 그대로의 진실을 먼저 보려고 노력하지 않는다. 의심으로 가득 찬 기록만 본다. 범죄는 논리가 아닐 때가 많다. 그런데 법원은 논리라는 자를 가지고 들이댄다. 판례라는 형틀을 통해서 기록만 본다. 그래서 판사들은 법이 보는 진실과 실체적 진실이 다르다고 한다. 그건 오판이 많다는 사실을 호도하는 위선이다. 생사람을 잡으면 법원도 책임을 져야 하지 않을까.
엄상익 변호사
※본 칼럼은 일요신문 편집방향과 다를 수도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