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 한 잔 마시며 마음을 소통할 수 있게 되기까지 그녀도 얼마나 많은 바람을 맞았을지.
이제는 끝난 그 전시회에서 ‘feel wind’라는 작품 앞에 오래 서 있었다. 눈을 감은 채 두 팔을 벌리고 있는 여인상이다. 그 여인은 단순한 디자인의 원피스를 입고 있다. 생명의 색, 초록이다.
그 여인은 혼곤한 세월을 견디며 마침내 바람을 느끼고 바람을 사랑하게 된 것 같다. 어떠한 인상도 쓰지 않은 채 지긋이 눈을 감고 있는 여인은 아마 바람과 함께 햇빛까지도 온전히 느끼고 있는 것 같다.
내면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자기 촉으로 살게 되면, 성공에 들뜨지 않게 되고 실패에 기죽지 않게 된다. 어려운 시간엔 외로움과 놀고, 잘나가는 시간엔 버거움과 논다. 성공의 옷을 입고 있는 이 시간의 나, 팽창된 자아를 ‘나’라고 생각해서 함부로 살지 않는다. 성공이 그를 풍요롭게 해주는 거라 생각하지 않는 만큼 실패가 그를 자포자기하게 하지 않는다. 성공이든, 실패든, 즐거움이든, 괴로움이든, 부든, 명예든, 가난이든, 관계의 어려움이든 모두 그를 지나가는 바람일러니.
그러나 그렇게 되기까지 우리는 또 얼마나 많은 바람을 맞고 상처를 입었을까. 사랑하는 조카가 대학에 떨어지고 소속이 없는 것이 이렇게 힘든 것인지 몰랐다고 고백했을 때 가슴이 얼마나 아팠는지, 제대로 된 일자리를 구하고자 했으나 번번이 실패하고 이 사회에서 버려진 것 같은 느낌으로 널브러져 있는 젊음은 왜 또 그리 많은지, 거기에다 그것밖에 안되냐는 가까운 사람들의 평가를 뒤집어쓰기라도 하면 소화되지 못한 분노의 에너지가 자신의 몸을 괴롭히고 마음을 괴롭혀 소화불량이나 두통, 혹은 우울증을 달고 살게 된다.
그것밖에 못하냐는 시선이 아픈 것은 혜민스님 말대로 하면 ‘나의 나’가 상처를 입은 것이다. TV에서 잠깐 혜민스님의 강의를 들었는데, 그때 스님이 말씀하신 것이 바로 ‘나의 나’와 ‘남의 나’의 구분법이었다.
짐작되는 대로 ‘남의 나’는 남이 생각하는 나고, ‘나의 나’는 내가 생각하는 나다. 그 두 ‘나’가 균형이 맞아야 하는데, 직장, 가족, 시댁이나 처가, 친구들의 시선이나 평가를 중시해 ‘남의 나’가 커지면, 행복은 저만치 가고, 삶은 고달파진다는 것이다.
스님은 종교학을 전공한 자신의 예를 들었다. 종교와 마음을 가르치고 싶어서 교수가 됐는데, 논문 강요하고, 인맥 관리해야 하는 일에 지쳐 교수직을 버렸단다. 그랬더니 주변에서 왜 그리 좋은 직장을 그만두냐고 난리였다는 것이다. 그는 ‘나의 나’가 행복하지 않은 일을 계속할 수 없다고 했다. 스님다웠다.
‘나의 나’가 단단해서 중심이 있어야 ‘남의 나’도 의미가 있다. 그래야 바람을 무서워하지 않고 바람을 느끼며 품을 수 있다.
이주향 수원대 교수
※본 칼럼은 일요신문 편집방향과 다를 수도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