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PGA에서 벌어들인 상금만 71억 원에 달하는 한희원은 이젠 ‘선수’보다는 ‘엄마’로서 살기로 했다고.
“난 전혀 허전하지 않았다. 오히려 홀가분했다. 장거리 이동에 지칠 대로 지쳐 있던 상태였고, 더 이상 많은 짐을 챙겨 비행기를 타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에 행복했다. 부친 짐이 도착하지 않아서 발을 동동 구르지 않아도 되고, 비행기 놓쳤다고 정신줄 놓지 않아서 좋았다. 어쩌면 그런 투어 생활에 한계를 느꼈기 때문에 은퇴를 서둘렀는지도 모른다. 골프채를 놓아야 할 때가 됐기 때문에 그런 생활에 염증을 느꼈을 것이고.”
―만약 그런 이유들이었다면 한국이나 가까운 일본에서 투어 생활을 이어갈 수 있는 방법도 있지 않았겠나.
“물론 그런 생각을 안 한 건 아니다. 한국은 물론 일본도 다 경험해 본 무대라 어렵지 않게 적응할 수 있었겠지만, 무엇보다 그냥 쉬고 싶었다. 아이 옆에서 정착해 있는 엄마이고 싶었다. 골프는 나이 먹어서도 칠 수 있지만, 아이와 함께 있는 생활은 스쳐 지나가는 것이기 때문에 때를 놓쳐선 안 된다고 생각했다. 작년부터 은퇴에 대해 고민을 했었고, 시기를 올해로 잡아놨기 때문에 은퇴를 놓고 갈등이 심하진 않았다.”
―LPGA 선수들을 보면 기혼자 중 남편과 아이와 함께 투어를 하는 선수들도 보이던데.
“나와 함께 은퇴한 장정도 세 살 된 딸을 데리고 다녔다. 물론 남편과 함께. 하지만 그 생활이 결코 만만치 않다. 골프에만 집중해도 될까 말까 하는 판에 아이와 남편까지 신경 쓰다 보니 가정도, 골프에도 다 충실하지 못한 결과가 나온다. 나도 대일이가 어렸을 때는 함께 다녔다. 그러다 아이한테 못할 짓 하는 것 같아 한국의 친정 부모님께 맡겼고, 남편이 한국에서 야구 해설을 하고 있어 아빠가 아이를 키우는 모양새가 됐다.”
―골프 얘기로 돌아가 보자. 초등학교 2학년 때 아버지(한영관, 한국리틀야구연맹 회장)의 권유로 골프에 입문, 취미가 특기로 돌아선 케이스였다. 한국에서 프로가 됐지만, 출전한 시합수가 많지 않았더라.
“내 기억으로는 2개 대회 정도 출전했던 것 같다. 당시의 목표는 일본 투어였다. 일본에서 성공해 미국으로 직행하려고 일본행에 모든 것을 집중했다. 그래서 대학도 일본에서 다녔다. 공부와 골프에 모든 걸 걸었던 시간들이었다. 일본어는 물론 경제학을 전공하면서 공부에 대한 재미를 느낄 수 있었다. 그러다 1999년 JLPGA 투어 신인왕을 차지한 것이다. 어차피 일본은 미국을 가기 위한 중간 단계였기 때문에 LPGA도 서둘렀다. 덕분에 2001년 LPGA 신인왕에 오를 수 있었다.”
―미국 진출 첫 해에는 풀시드가 아니었는데, 힘들지 않았나.
“풀시드가 아니어서 힘들었기보다는 엄청난 이동 거리를 감당하기가 어려웠다. 다시 일본으로 돌아가고 싶은 생각이 굴뚝같았다. 아빠도 미국에서 첫 우승만 하면 다시 일본으로 돌아가도 된다고 말씀하셨다. 그렇게 첫 승만 기다리다 2002년은 7차례의 톱 10에 들고 우승 없이 지나갔다. 그러다 2003년에 첫 승을 이뤘고, 2승까지 이어졌다. 톱 10에도 11차례나 들어갔다. 성적이 나니까 미국 투어가 재미있어지더라. 첫 승하고 일본으로 돌아가려 했던 계획이 순식간에 사라졌다(웃음).”
―2006년까지 모두 6승을 이룬 후 은퇴할 때까지 우승이 없었다. 결코 짧지 않은 시간들이라 우승 없이 보낸 생활이 쉬이 짐작이 안 간다.
“한국 선수들이 LPGA 진출 후 수많은 우승을 차지했다. 어느 우승도 쉽게 닿은 것은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한국에선 우승하지 못하는 선수들에 대해선 작은 관심조차 주질 않는다. 나이 먹고, 우승이 없는 선수한테는 ‘한물갔다’는 표현을 서슴지 않는 곳이 한국 언론이다. 나는 언론의 관심 밖에 있어서 그런 부분에 상처를 덜 받았지만, (박)세리 언니는 우승을 하지 못하는 동안 두 배 이상의 고통이 뒤따랐을 것이다.”
―박세리와 친분이 상당하다고 들었다. 후배의 은퇴 소식에 어떤 반응을 나타내던가.
“언니 입장에선 모두 떠나고 혼자 남는 듯한 기분이 들었을 것이다. 물론 수많은 후배들이 LPGA를 누비고 있지만, 2000년대 LPGA에서 활약한 세대들한테 느끼는 감정과 지금의 후배들과는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다. 그 당시에 동고동락했던 언니들과는 친자매 이상의 끈끈함이 존재한다. 지금은 (김)미현 언니, (박)지은이에다 나까지 은퇴한 터라 세리 언니가 느낄 외로움이 더욱 클 것 같다. 세리 언니보다 성적이 좋은 박인비도 있고, 최나연도 있지만, 그래도 한국 여자 골프사에서 박세리만 한 골퍼는 앞으로도 나오기 힘들지 않을까 싶다. 단순히 성적을 내는 것 이상의 역할을 세리 언니가 해왔고, 그로 인해 결혼도 늦어진다고 생각한다.”
야구해설위원인 남편 손혁과 함께한 모습. 2003년 결혼 당시 프로야구선수와 프로골퍼의 만남으로 큰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임준선 기자 kjlim@ilyo.co.kr
―지금까지 가장 극심한 슬럼프를 겪은 적이 언제였나.
“프로 생활하면서 기억에 남을 정도의 슬럼프는 없었다. 물론 경기가 마음대로 풀리지 않을 땐 짜증이 폭발했지만, 그것도 생활화되다보면 어느 순간부터 ‘그러려니’해진다. 골프에서의 슬럼프보다는 이런 투어 생활이 지겨워지면서 골프가 힘들어졌다. 어린 나이에는 언니들과 어울려 다니는 게 즐거웠고, 스트레스 푸는 방법이었는데 언제부턴가 그런 것도 심드렁해지더라. 그래서 골프장에서 나오면 곧장 집으로 오고, 혼자 밥 먹고 운동하고. 그러다 엄마가 아이를 데리고 미국에 오시면 같이 있을 때는 즐겁다가 아이가 떠난 후에는 그리움과 외로움이 물밀 듯했다. 그때 이런 생각이 들었다. ‘한희원, 너 여기서 지금 뭐 하고 있니?’라고. 과연 무엇 때문에 가족과 떨어져 이 고생을 하는지, 순간 이해가 안 됐다.”
―아들 대일이를 임신했을 때 대회 출전을 강행했다. 배가 나오면 스윙폼이 달라질 수밖에 없었을 텐데 대회를 포기하지 않았다.
“만약 한국이었다면 그런 모습을 보이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미국에선 임신한 골퍼들이 많았고, 그들이 시합에 출전하는 모습도 자주 볼 수 있었다. 그래서 나 또한 고민하지 않고 투어를 이어간 것이다. 그런데 임신 후 스윙폼이 달라지는 건 사실이다. 배가 나오니까 정상적인 상태에서의 스윙과는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임신 후에 하와이도 가고, 멕시코 대회에도 출전했다. 임신 7개월 때까지 골프채를 놓지 않았다.”
―남편이 손혁 해설위원이다. 2003년 결혼할 때만 해도 프로야구 선수와 프로골퍼의 만남이라 큰 화제를 모았었다. 서로 생활하는 분야가 달라 한쪽이 포기하지 않는 한 결혼 생활을 유지하기 어려웠을 것 같다.
“연애할 때부터 전화 데이트가 더 많았다. 오빠는 야구해야 하고, 난 골프를 쳐야 했으니까 자주 만날 수 있는 상황이 안 됐다. 2003년 결혼할 당시, LPGA에서 활약 중인 한국 선수들 중에는 내가 첫 기혼자였다. 주위에선 너무 어린 나이에 결혼하는 거 아니냐고 걱정했지만, 난 좋아하는 사람과 하루 빨리 가정을 꾸리고 싶었다. 내가 골프장에서나 한희원이지, 나에게 골프를 빼면 정말 초라하고 평범한 여자라는 생각에 결혼을 서둘렀다. 지금 주위를 돌아보면 결혼 후 가정이 깨진 골퍼들도 많다. 그들만의 사연이 있겠지만, 우리 부부는 서로를 신뢰했고 서로의 일을 존중했기 때문에 지금까지 투닥거리면서 살고 있는 것 같다.”
―손혁 위원은 아내의 은퇴에 대해 어떤 반응을 보였나.
“남편이 야구에서 은퇴할 때 아쉬움이 컸었다. 후회도 많았다. 그래서 내가 은퇴할 때는 후회하지 말라고 얘기하더라. 하지만 난 남편처럼 더 할 수 있을 때 부상으로 그만둔 게 아니라 할 만큼 했기 때문에 미련 없이 끝낼 수 있었다.”
한희원은 인터뷰 말미에 한국 골프계의 안타까운 자화상에 대해 쓴소리를 남겼다. 충분히 곱씹어볼 만한 내용이었다.
“한국은 골퍼들이 성형수술하지 않으면 살아남기 힘든 것 같다. 성형하는 선수들이 대부분이고, 치마 길이가 짧아도 너무 짧다. 선수들은 풀 메이크업을 하고 나온다. 예쁘게 보이는 건 좋지만, 외모에 치중하는 바람에 골프장이 골프를 위해 모여 있는 것인지, 모델들이 공을 치는지 모를 정도가 됐다. 형형색색의 컬러풀한 옷을 입고 진한 메이크업을 하고 타이트한 셔츠에 짧은 치마를 입고 라운딩하는 선수들을 볼 때, 솔직히 안타까움이 컸다. 미국에선 화장 할 시간이 없었다. 그 시간에 연습해야 했으니까. 외모지상주의가 골프계에 깊이 스며든 것 같아 마음이 아프다.”
이영미 스포츠전문기자 riveroflym@ilyo.co.kr